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1차 직봉전쟁 (문단 편집) === 전쟁의 시작 === 4월 21일, 우페이푸는 치셰위안, 진광원, 톈중위, 자오티, 소요남, 펑위샹, 유진화와 연명으로 "통일을 한다는 구실로 먼저 통일을 방해하고 있고 장애를 제거한다는 구실로 오히려 자기가 장애가 되고 있다."라며 장쭤린을 비난했다. 4월 23일 장쭤린은 전문을 보내 관내진출에 대해 쉬스창과 조씨 형제의 동의를 얻은 것이라고 주장하며 맞섰고 4월 25일 우페이푸가 직계 장령들과 연명으로 장쭤린의 10대 죄상이라는 것을 발표, "쭤린이 죽지 않으면 큰 도둑이 멈추지 않을 것이다. 우페이푸는 이미 비적을 소탕할 책무를 짊어졌으므로 마땅히 적과 내통하는 배반자를 없애는 정의를 실현하겠다."고 입장을 표명하며 직접 전선으로 나가서 독전했다. 한편 우페이푸는 자오티가 1921년의 병변을 펑위샹이 지원한 것 때문에 자신에게 불만을 품고 장쭤린과 결탁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후방 안정화 작업에 들어갔다. 펑위샹의 11사단과 섬군 1사단, 북양군 혼성 4여단이 이미 동관을 출발하여 선두부대가 뤄양에 이르렀는데 우페이푸는 전선으로 가면서 펑위샹에게 섬군 총사령 겸 직노예 순열부사 직권을 부여하여 후방 각군의 통제를 맡게 하고 자오티의 굉위군을 견제하게 하였다. 이때 봉군은 장징후이가 서로군 총사령관에 임명, 장신점에 사령부를 설치하고 다시 부대를 3개로 나누어 1부대장을 장징후이가, 2부대장을 추분이, 3부대장을 전정승이 맡았다. 동로군은 장쭤샹이 총사련관을 맡아 낙벌에 사령부를 설치하고 3개의 보병 부대에 1개 기병부대를 거느렸다. 1부대장은 장쭤샹이, 2부대장은 [[장쉐량]]이, 3부대장은 [[리징린]]이 맡았으며 기병부대장은 허란주가, 참모장은 창인화이(상음괴)가 맡았다. 장쉐량의 2부대 산하에는 봉군 3혼성여단, [[궈쑹링]]의 8혼성여단, 채병폰의 4혼성여단이 있었고 2로군을 합쳐 봉군의 총 병력은 12만에 달했다. 한편 장쭤린은 궈쑹링의 부하 [[성스차이]]를 사천성에 파견하여 [[류샹]], [[쑨촨팡]]을 직계군벌 진영에서 이탈시키라는 임무를 맡겼다. 이에 맞서 직군은 탁주에 총사령부를 설치, 우페이푸가 총사령관을 맡았으며 왕승빈을 서로군 총사령관에 임명하여 고안에 사령부를 설치하였다. 왕승빈의 23사단, 장복래의 24사단, 펑위샹 휘하의 이명종의 15혼성여단, 장극요의 1혼성여단, 3사단의 일부 병력이 서로군에 소속되어 있었다. 이들은 유리하와 고안에 주둔하며 방어진지를 설치했다. 동로군 총사령관은 장국용이 맡고 마창에 총사령부를 설치했는데 장국용의 26사단, 동정국의 13혼성여단, 팽수신의 14혼성여단, 손악의 16혼성여단을 거느렸다. 이들은 우두진, 전가구, 승방, 대성, 자아하를 점거하고 부대를 점검하고 있었는데 직군은 2로군을 모두 합쳐 10만에 달했다. 4월 28일 심야, 직봉 양군이 접전에 들어가면서 마침내 1차 직봉전쟁이 시작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